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어느 날 슬그머니 치과대기실에 날적이를 올려두었다. 날적이는 옛날에 대학교 다니던 시절 속해있던 동아리 방 소파 옆 탁자 위에 항상 올려 져 있던 일기장 같은 것이었다.
이무도 이름을 쓰진 않았지만 글만 봐도 누가 썼는지 바로 알 수 있었을 만큼 모두가 위트와 개성이 넘쳤다.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있었고 인쇄를 한 것 같은 반듯하고 예쁜 서체로 쓴 일기도 있었다. 겉멋에 취해 휘갈겨 쓴 명언 같은 것도 있었지만 당사자가 누군지 몰랐다면 그저 의미 없는 낙서였을 것이다. 당사자가 누군지 글씨체로 뻔히 알 수 있었기 때문에 뻔한 글도 위트 있는 글로 둔갑했다. 고독한 예술가처럼 날 세우기가 컨셉이었던 한 선배의 ‘모든 게 다 짜증난다’ 와 같은 신경질적인 글에도 선배라면 그럴 수 있다며 다같이 푸하하 웃을 수 있었다. 그 글은 썰렁하고 어색한 공기를 웃을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 주는 효력이 있었다.
기다림에 지칠 때, 신입단원이었던 시절 그냥 앉아있기 어색했을 때에도 이리저리 넘겨봤던 날적이.
주로 자신만의 세계에 빠진듯한 알 수 없는 글들이 주를 이루었지만 사실 내용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. ‘내가 왔다 갔었음’하는 일종의 표식이었다. 차갑고 어색하고 어두운 회색 빛 공간에서 혼자 따뜻한 온기를 발하는 존재였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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